돈을 넣으면 세금은 그 자리에서 깎이지만, 그 돈이 무언가를 사는 일은 따로 일어난다. 둘을 한 동작으로 알고 있으면 몇 해가 그냥 지나간다.
연말정산을 앞두고 연금저축이나 IRP에 돈을 넣는다. IRP는 개인형퇴직연금, 퇴직금을 받아두거나 스스로 돈을 넣어 노후에 쓰는 계좌를 말한다. 넣은 만큼 세금이 깎이는 것은 맞다.
그런데 넣어두면 그다음은 알아서 되는 걸까? 여기서 계좌마다 답이 갈린다. 이번 글에서는 계좌에 넣은 돈이 실제로 굴러가기까지 무엇이 더 필요한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넣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른 동작이다
은행 예금은 넣으면 그것으로 끝난다. 넣는 순간 이자가 붙기 시작한다.
연금저축펀드나 IRP는 그렇지 않다. 계좌는 돈을 담는 곳이고, 그 돈으로 무엇을 살지는 따로 정해야 한다. 사지 않으면 그 돈은 계좌 안에 현금으로 앉아 있는다. 세액공제는 이미 받았으니 숫자상으로는 손해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세액공제는 넣은 사실에 붙고, 수익은 산 것에 붙는다. 앞의 것만 받고 뒤의 것을 비워둔 상태가 몇 해씩 이어지는 일이 실제로 흔하다.
퇴직연금에는 대신 눌러주는 장치가 있다
퇴직연금에는 이 빈칸을 메우려고 만든 제도가 있다. 사전지정운용제도, 흔히 디폴트옵션이라고 부른다. 가입자가 스스로 고르지 않으면 미리 정해둔 방법으로 적립금을 굴리는 제도다.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제21조의3이 그 절차를 정해두었다. 고른 상품의 기간이 끝나고 4주가 지나면 퇴직연금사업자가 알린다. 그 통지를 받고도 2주 안에 안 고르면 이렇게 된다.
가입자가 제3항에 따른 통지를 받은 후 2주 이내에 운용방법을 스스로 선정하지 아니할 경우 운용관리업무를 수행하는 퇴직연금사업자는 해당 가입자의 적립금을 사전지정운용방법으로 운용한다. 이 경우 가입자가 스스로 운용방법을 사전지정운용방법으로 선정한 것으로 본다.
—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제21조의3 제4항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어볼 만하다. 안 골랐는데 고른 것으로 본다고 되어 있다. 가만히 두는 것도 하나의 선택으로 처리된다는 뜻이다.
이 제도가 걸리는 계좌는 확정기여형(DC)과 IRP 둘이다. 확정기여형은 회사가 돈을 넣어주고 굴리는 일은 내가 하는 방식을 말한다. 회사가 정해진 금액을 책임지는 확정급여형(DB)은 애초에 회사가 굴리므로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두 방식의 차이는 퇴직금 DB DC IRP 차이에 정리해두었다.
그런데 그 장치가 데려가는 곳이 어디인가
그렇다면 그 장치는 돈을 어디로 데려갈까.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이 2026년 5월에 낸 「2025년 우리나라 퇴직연금 투자 백서」에 답이 있다.
디폴트옵션(53.3조원)은 규모에 비해 낮은 수익률(3.7%)이었는데 (…) 안정형 비중(85.4%)이 과중한데 기인
— 고용노동부·금융감독원, 2025년 우리나라 퇴직연금 투자 백서
2025년 말 기준으로 이 제도에 들어온 돈이 53조 3천억원인데, 그중 85.4%가 안정형에 몰려 있다. 안정형은 원금이 지켜지는 쪽으로 짜인 상품이다.
그 85.4%는 고른 결과일까, 안 골라서 그리로 간 것일까? 알 수 없다. 법이 안 고른 것을 「선정한 것으로 본다」고 처리하고, 통계도 둘을 한 칸에 넣기 때문이다. 스스로 안정형을 고른 사람과 6주를 그냥 흘려보낸 사람이 같은 숫자 안에 들어가 있다.
여기서 내 생각을 밝혀둔다. 나는 안정형이 나쁜 선택이라고 보지 않는다. 원금이 줄면 곤란한 돈이라면 그쪽이 맞다. 무엇을 사라고 말할 생각도 없다.
다만 고르지 않은 것과 고른 것은 다르다고 본다. 지금 결과가 같아 보여도 그렇다. 내가 골라서 거기 있는 돈은 상황이 바뀌면 다시 고를 수 있다. 안 골라서 간 자리는 바뀐 줄도 모른다.
그러니 통계로는 답이 안 나온다. 계좌를 열어봐야 안다.
연금저축과 ISA에는 그 장치가 없다

여기가 계좌마다 갈리는 대목이다.
사전지정운용제도는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이 만든 제도다. 그런데 이 법이 다루는 것은 회사 퇴직연금과 IRP뿐이다. 연금저축계좌와 ISA는 이 법의 대상이 아니다. 근거로 삼는 법이 아예 다르다.
그래서 연금저축펀드와 중개형 ISA에서는 내가 사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4주도 2주도 없고 통지도 없다. 중개형 ISA는 계좌 안에서 예금·펀드·주식을 직접 골라 담는 형태를 말한다. 고르는 일이 통째로 내 몫이라는 뜻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를 갈라야 한다. 연금저축은 형태가 여럿이다. 금융위원회가 낸 「2025년 우리나라 연금저축 투자 백서」를 보면 2025년 말 기준 적립금 198조 2천억원 가운데 보험이 114조 1천억원으로 57.6%를 차지한다. 보험은 보험료를 내면 계약이 그대로 굴러가는 구조라 「사야 하는」 계좌가 아니다.
즉 안 사서 비어 있을 수 있는 것은 나머지 42.4%다. 연금저축펀드와 중개형 ISA 쪽이다. 같은 「연금저축」이라는 이름 아래 성격이 다른 계좌가 섞여 있다.
오늘 확인할 것 하나
계좌에 들어가서 넣은 금액과 산 금액이 같은지 본다. 현금성 잔액이나 예수금으로 표시되는 자리에 돈이 남아 있으면 그만큼은 아직 아무것도 안 한 상태다.
퇴직연금이라면 하나 더 본다. 지금 굴러가는 상품이 내가 고른 것인가, 안 골라서 자동으로 들어간 것인가? 화면에 사전지정운용방법이나 디폴트옵션이라고 적혀 있으면 뒤쪽이다. 뒤쪽이어도 그대로 두면 된다. 확인하는 것과 바꾸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ISA도 같은 자리를 본다. 이 계좌가 해주는 일은 안에서 난 이익과 손실을 합쳐 계산하고 일정액까지 세금을 안 매기는 것인데, 그 혜택은 사고팔아야 생긴다. 넣어두기만 하면 합칠 이익도 손실도 없다. 어디까지 합쳐주고 얼마까지 안 매기는지는 ISA 계좌란? 손익통산과 비과세 한도 정리에 정리해두었다.
넣을 금액을 아직 안 정했다면 순서가 하나 더 있다. 세액공제는 연금저축만으로 600만원, IRP를 더해 900만원까지 인정되고 소득에 따라 13.2%나 16.5%가 돌아온다. 구간별로 실제 얼마가 오는지는 연금저축과 IRP, 세액공제로 실제 얼마나 돌려받을까에 계산해두었다.
이번 글에서는 계좌에 넣은 돈이 굴러가기까지 무엇이 더 필요한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돈을 넣는 것은 한 번에 끝나고, 무엇을 살지 정하는 것은 그와 별개로 한 번 더 해야 하는 일이다. 세금은 앞의 것만 보고 깎아주지만 노후에 쓸 돈은 뒤의 것에서 나온다.
오늘 계좌를 한 번 열어보자. 넣은 금액과 산 금액이 같은지만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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